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구스트 3세 (문단 편집) === 7년 전쟁 및 죽음 === 7년 전쟁이 발발한 1756년 8월 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가 작센을 침공하자, 9월 8일 드레스덴을 떠나 피르나에 주둔한 작센군에 합류했다. 아우구스트 3세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황제군|오스트리아군]] 원수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은 그에게 10월 11일까지 기다려달라고 응답했다. 그러나 브라운 원수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로보지츠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하자, 피르나에 주둔한 작센 수비대는 10월 16일에 항복했고 아우구스트 3세는 10월 20일 [[바르샤바]]로 도주했다. 10월 27일 바르샤바에 도착한 아우구스트 3세는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으나 별다른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사냥과 취미 생활에만 열중했다. 전쟁이 끝난 뒤, 아우구스트 3세는 1763년 8월 2일 드레스덴으로 돌아왔으나 불과 2달 후인 10월 5일 [[뇌졸중]]으로 67세에 세상을 떠났다. 장남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이 그의 뒤를 이어 작센 선제후가 되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나 2세]]의 지원을 받은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가 선출되었다. 그가 죽자, 당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드레스덴 궁정악장]]이였던 작곡가 [[요한 아돌프 하세]]가 그의 장례미사를 위해 [[레퀴엠 C장조(하세)|레퀴엠 C장조]]를 작곡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